[정욱식] 국정 교과서와 남북 관계

by 장산곳매 posted Nov 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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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교과서, 새누리당 장기 집권 플랜!"

[정욱식 칼럼] 국정 교과서와 남북 관계

 

 

 

박근혜 정부가 기어코 중·고교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강행했다. 그 전형적인 수법은 역시 '북한 불러오기'였다. 마치 현행 검·인정 교과서가 친북적으로 서술된 것처럼 궤변을 일삼으면서 '국정 교과서 반대=친북·종북'이라는 프레임을 만들려고 한다. 황교안 총리가 파워포인트까지 동원하면서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도 이를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기사 : 정부, 국정화 확정 발표..."99%가 편향 교과서 선택")

황 총리의 담화를 비롯해 정부-여당의 국정화 논리가 얼마나 황당한 궤변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내가 주목하는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곳에 있다. 국정 교과서가 남북 관계와 한국 정치에 끼칠 해악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대표적인 게 바로 천안함 사건이다.

▲ 황교안 총리가 3일 서울정부청사에서 올바른 교과서 발행 체제 개선 관련 기자 회견에 참석해 국정 교과서 확정 고시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천안함 사건을 계속 이용하겠다?

나는 황 총리가 현행 교과서가 편향되어 있다는 대표적인 근거로 천안함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8.25 합의 직후에 나온 통일부와 청와대의 엇박자를 떠올렸다. 당시 통일부는 판문점 고위급 접촉에서 천안함 및 5.24 조치 해제 문제도 논의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이를 즉각 부인하면서 오히려 남북 관계의 속도 조절론을 제기했다. 그리곤 역사 교과서 문제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부와 여당의 음산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8.25 합의를 발판으로 삼아 당국자 회담을 열게 되면 5.24 조치 문제는 핵심적인 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해결 방식 역시 지뢰 사건과 유사하게 풀 수도 있다. 이는 북측이 천안함 침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면 남측은 이를 북한의 시인과 사과로 받아들이고 5.24 조치를 해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남북 관계는 빠르게 정상화될 수 있고, 꽉 막힌 한국 경제에도 희소식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정부 여당으로서는 천안함 사건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결국 정부 여당이 선택한 것은 국내 정치적 이용이다. 정부는 8.25 합의문에 담긴 당국자 회담을 3개월 가까이 지나도록 공개적으로 제안하지 않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잘 마무리 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대신 정부 여당은 현행 교과서가 편향되었다는 근거로 천안함 사건을 들고 나왔다. 이는 곧 천안함 사건을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장기 집권 플랜?

나는 앞선 글에서 국정 교과서 시도가 장기 집권 플랜의 일환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미 세대 간의 투표 성향이 뚜렷하게 갈리면서 정부·여당은 20대와 미래 세대의 표심을 확보하면 장기적인 집권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정부·여당은 이른바 '헬조선'으로 상징되는 젊은 세대의 분노어린 절망을 치유할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부·여당은 황당하게도 '헬조선'을 현행 역사 교과서의 탓으로 돌린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는 논리이다. 이건 그나마 쓴웃음으로 날려 보낼 수 있다. 문제는 국정 교과서가 품고 있는 장기적 정치 공학에 있다.

아마도 국정 교과서는 친일과 독재 부분을 크게 줄이거나 미화하면서 북한을 악마화하는 비중을 대거 높이는 방향으로 서술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의원들, 그리고 황 총리의 담화에서도 이러한 방향성을 엿볼 수 있다.

정부 여당은 이런 단일 교과서를 배운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면 색깔론의 위력을 계속 살릴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북한과의 화해 협력과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을 종북으로 몰아붙이면서 '반북·안보 프레임'을 끊임없이 재생산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군대와 예비군 및 민방위는 물론이고, 초·중·고 학교에서도 '안보'를 빙자한 '편향된 정치 교육'이 한창이다. 또한 '신냉전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2030 세대에서는 북한과 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2030 세대가 사회 경제 이슈에서는 진보적 성향을 보이면서도 남북 관계에서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언론 환경도 종북 몰이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기득권 세력의 시각에서는 이제 교과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역사 교과서를 통해 청소년을 개조시키면 장기 집권을 도모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올 법한 정치 현실이다.

일각에서는 '청소년이 국정 교과서로 배우더라도 성인이 되면 역사의 진실을 알고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안일한 생각이다. 과거 '재학습의 현장'이었던 대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취업 준비용'으로 변질되고 있다. 학점이 낮고 별다른 스펙이 없어도 취업 걱정이 크게 없었던 이전 세대와 죽을힘을 다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현세대와 미래 시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국정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중·고교 학생들이 20대가 되어도 이들 가운데 다수가 새누리당 지지자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정부 여당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내 편이 되지 않더라도 네 편만 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정치를 혐오하고 외면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게 자기한테 유리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문제의 핵심은 야권에 있다. 국정화의 핵심이 정부 여당의 장기 집권 플랜에 있다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획과 능력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야권에서는 '박근혜 교과서가 만들어지더라도 1년짜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건 야권의 대선 승리를 전제로 한 얘기이다. 하지만 야권 관계자 누구도 자신 있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야권은 이러한 자기모순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정상과 몰상식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현 집권 세력을 이길 수 있다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국정화 반대 여론은 점차 식어가고 결국 여권의 장기 집권 토대를 깔아주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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