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 대투쟁 -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된 그해 여름

by 관리자 posted Aug 0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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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된 그해 여름


 


 




= 기획연재 87년 노동자 대투쟁 - 그때 그 사건들 =


87년 노동자 대투쟁 기획연재
① 그 때 그 사건들
② 그 때 그 사람들
③ 좌담 (현재 노동운동 진단)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노조결성 전국 점화

1987년 7월 5일 낮1시경 울산 옥교동의 한 디스코텍. 20대 후반 30대 초반 노동자들 100여명이 우르르 들어가자마자 셔터 문이 내려졌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비밀리에, 그러나 환호와 박수 속에서 현대엔진노조 결성식이 진행됐다. 현대노동자들이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노조는 안 된다’던 현대자본의 탄압을 뚫고 인간 선언의 승리를 이뤄낸 것이다. 현대엔진 노조 결성은 순식간에 전국을 강타했다. 많은 곳에서 사측이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를 탄압했으나 노동자의 거대한 투쟁 앞에서 속속 무릎을 꿇었다.
20일 뒤인 7월 25일 현대자동차 식당 앞. “민주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공장을 한바퀴 돌자 대오는 약5천명으로 불어났다. 노동자들은 이틀 연속 파업을 벌였고 마침내 현대자동차에 민주노조를 세워냈다. 울산에 이어 7월 말 부산에서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세신정밀, 국제상사가 노조를 결성했다. 8월 초엔 마산 창원으로 이어지고 곧 전국으로 번져 노동자의 인간선언이 봇물을 이루며 터져나왔다. 1987년 몇 달 새 1,428개의 노조가 결성됐고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입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금속노동자가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됐다.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폭압적 노동에서 노동자가 자주적으로 일어서는 계기가 된 것은 앞서 있었던 6월 항쟁이었다.

공단과 지역을 휩쓴 수만의 노동자군대

“노동자도 인간이다. 훌라 훌라” 8월 11일 창원대로에 수 만 명의 노동자들이 지게차를 앞세우고 행진을 했다.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 속을 돌진 했다. 당시 한국중공업 병역특례병으로 있던 김춘백 현 경남지부 부지부장은 “회사 앞에서 조합원 전체가 모여 마산시내까지 걸어 나왔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8월 중순까지 매일같이 마산역이나 수출삼각공원에 모였고, 구속자가 생기면 파출소를 습격하고, 민정당 타격투쟁을 전개했다.
“정주영은 물러가라”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하라” “임금인상 즉각 실시하라” 8월 18일 오후, 울산 현대중공업노동자들은 샌딩머신(모래를 뿌리는 기계)을 비롯해 덤프트럭, 소방차, 카고 트럭, 지게차 등을 앞세우고 거리행진을 시작했고 대오는 5만을 넘어섰다. 남목고개를 넘어 공설운동장으로 집결, 시청을 점거했을 때는 어둠이 깔렸었다. 기계를 앞세운 노동자의 군대는 아무도 막지 못했고 이틀 만에 자본가의 항복을 받아냈다. 마침내 현대중공업에 민주노조가 생긴 것이다 .
쟁의는 하루 평균 44건이 일어났다. 선 파업 후 협상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쟁의에 들어간 것은 5.9%에 불과했다. 파업하면 가두투쟁으로 이어졌다. 애초 집회신고 같은 것은 없었다. 특히 8월 17~18일 울산 투쟁은 열흘 전 결성된 현대그룹노동자협의회가 주도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단사를 넘어 지역과 업종으로 그룹으로 연대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인천에서는 8월 10일 인천 대우자동차 농성이 부평4공단 투쟁으로 번졌고, 영창악기, 대우전자, 경동 등으로 확산됐다. 노동자들의 지역연대는 이후 지역노조협의회를 결성케 했다.

22살의 노동자
직격탄에 목숨 빼앗겨


1987년 8월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노조 결성”, “임금 인상” 등을 외치며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우재벌은 무성의와 공권력으로 짓밟았다. 8월 11일 김우중 회장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합원들은 회장이 묵고 있다는 대우옥포 호텔 앞으로 몰려갔다. 회장을 만나자고 들어가려니까 경찰들이 막아섰다. 경찰은 전부다 앉아서 오리걸음으로 들어가면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앉아서 오리걸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최루탄을 쐈고 그 중 하나가 한 노동자의 허파를 관통했다. 22살의 이석규 열사는 이렇게 운명했다. 그러나 열사의 장례식 중 군사정권은 시신을 탈취하고 지도부를 연행해갔다. 당시 933명이 연행되고 64명이 구속됐다. 현재 대통령인 노무현과 노동부장관인 이상수도 한때 연행됐다 풀려났다.
군사정권은 이석규 열사 장례를 기점으로 “좌경폭도 세력” “외부 불순세력”이라며 대대적인 악선동을 자행했다. 또 한편으로는 집단해고, 휴폐업, 구시대 폭력, 지도부구속 등으로 민주노조를 파괴하고 노동자투쟁을 무너뜨리기 위해 발악을 했다.

20년 전과
달라진 것들


87년 그 해 여름 투쟁으로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결성하고, 20~30%이상의 임금인상을 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 20년 전의 우리는 자신감을 획득하고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선 것이다.
“당시엔 공돌이 공순이라 해서 선보면 백번 다 퇴짜 맞았지. 월급타면 방세내고 살기 바빴고, 회사에서도 사람취급 못 받았지” 백순환 전 금속산업연맹위원장은 노동자가 인간대접을 받게 된 게 87년 투쟁의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그러나 20년은 사람, 조직, 투쟁 등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김춘백 경남지부 부지부장은 “당시엔 없었던 노동자 내부의 갈등과 조건의 차이로 한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 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루빨리 금속노조의 중앙교섭이 사회적 규정을 갖는 산별협약이 되도록 법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금속노조 손태현 선거관리위원장(현대자동차지부)은 “당시 현대자동차는 개나 소나 줄만 서면 들어갈 수 있었고,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없었다”고 말한다. 뭘 해도 기술하나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내가 어느 편에 서야 가족의 생계를 지키고 일터를 유지할 것인가부터 고민하게 만드는 게 현실이다.
“제일 크게 달라진 것은 박창수도 김주익도 없어진 것”이라며 말을 꺼내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그 때는 투쟁의 중심도 세상의 중심도 대중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대중의 자발적인 열기가 사라지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게 노동자의 본연의 임무란 걸 잊고 있는 것 같다.”고 충고했다. 그는 “20년 전 그 때 우리의 자리에 서 있는 비정규직들과 연대하는 게 20년 전 그 때 그 정신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