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초만에 ‘조선학교 보조금 박탈’ 정당화한 오사카 고등법원

by 이어도 posted Ma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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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고등법원앞_법원 입장을 위해 기다리는 학생들과 동포들
오사카 고등법원앞_법원 입장을 위해 기다리는 학생들과 동포들ⓒ몽당연필 제공

우리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사회에서 일하며, 세금도 빠짐없이 납부하고 살아왔다. 조선학교와 모든 각종학교에 1974년부터 지급되어온 취학보조금이 정치, 외교 등의 문제로 조선학교에만 교부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치가와 지자체에 부여된 무제한의 재량권이 우리 아이들의 배울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앞으로 일본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것이다. 일본학교에 다니지 않는 이유는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뿌리를 조선학교에서 배우고 미래를 향해 꿈을 키우며 학교에 다닌다. 정치와 분립되어야 마땅한 사법이 아이들에게 차별과 이지메를 허용하는 판결을 한 것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아이들은 사회와 어른들에게 보호받아야 할 존재임에도 일본에서는 조선학교 아이들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조선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엄마로서 멈출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싸워나갈 것이다.

- 히가시오사카 조선초중급학교 어머니


지난 3월 20일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조선학교 보조금 항소심 판결에 보호자 대표로 나선 어머니가 재판이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일본 민주당 정권은 2010년 4월 고교무상화법을 제정해 공립학교는 물론 사립학교와 각종학교, 외국인학교에도 이 제도를 적용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조선학교만 대상에서 제외된다.

오사카시에서는 1988년도부터 ‘의무교육에 준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각종학교’로 보조금을 받아왔고, 오사카부에서는 1991년 ‘사립외국인학교 진흥보조금’ 제도를 만들어 부내 10개교의 조선학교에도 보조금 혜택이 적용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하시모토 토오루 오사카부지사는 조선학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보조금 지급을 보류시켰다.

2012년 3월 29일, 어렵사리 오사카부에서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재차 보조금을 요청한 학교측에 돌아온 답변은 궁색하기만 했다. 같은 해 2월 북에서 열린 설맞이공연에 조선학교 학생이 참가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 차별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마다 꺼내놓는 정치적 만능카드다.

오사카 지역 어머니들
오사카 지역 어머니들ⓒ몽당연필 제공

같은 해 9월 20일, 원고가 된 조선학원 측은 오사카부와 오사카시를 상대로 2011년도에 보조금 지급을 정지한 행정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2014년 1월에는 국가배상을 추가했다.

오사카에서는 지난해 7월 28일, ‘고교무상화’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한 문부과학대신의 처분을 취소하고, 조선학교를 무상화법 적용의 대상으로 지정하라는 재판부 판결이 있었다. 이는 조선학교 측의 첫 승소판결이다. 그러나 법률로 제정한 무상화법과 달리 이른바 ‘보조금’제도는 지자체장의 재량권이 크게 좌우되는 고무줄 같은 혜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재 조선학교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지자체는 28개 가운데 절반이상 줄어든 10곳에 불과하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일본인 납치문제를 주된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정치적 입지 보전을 위해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는 지자체장의 한마디에 조선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재판을 통해서라도 권리를 찾아야 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일본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조선학교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오사카지역은 무상화재판과 더불어 보조금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의 5개 지역(도쿄, 히로시마, 아이치, 규슈, 오사카) 가운데 유일하다. 2017년 1월 26일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있은 1심 판결은 보조금 교부를 거부한 오사카부와 시의 결정이 ‘지자체의 재량권 범위내의 처분’이라며 원고(학교)의 청구를 기각했다. 항소를 제기한 오사카 조선학원은 이날 있은 항소심 판결에서 재판부의 정의를 기대했지만, 일본의 사법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지자체의 손을 들어주었다.

'부당판결', '행정차별에 사법이 가담!' 재판결과를 알리는 동포 변호사들
'부당판결', '행정차별에 사법이 가담!' 재판결과를 알리는 동포 변호사들ⓒ몽당연필 제공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모두 원고가 부담한다’

1년 동안 항소심을 준비해온 변호인단, 보호자, 일본인 지원자들 그리고 방청석 맨 앞자리를 채웠던 26명의 고등학생이 들은 재판관의 주문은 단 3.5초 만에 끝났다.

주문을 읽은 재판부는 도망치듯 법정을 빠져나갔고, 현장에 있던 모두는 망연자실 재판부가 빠져나간 자리를 볼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 사법이 혼연일체가 되어 어렵게 민족교육을 지켜가고 있는 조선학교를 일본사회에서 철저히 배제시키는 판결에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날은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지는 잔뜩 흐린 날씨였다. 고등법원 앞에는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과 노란 모자를 쓴 어린 초급학생들이 재판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빗줄기 속에 대열해 있었다. 법원 앞에 모여든 기자들은 학생들과 보호자, 그리고 일본인 지원자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고등학생 26명이 법정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당첨된 방청권을 양보하는 보호자들에게서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 읽혀졌다.

어린 학생들이 당연히 누려야 될 권리를 빼앗은 판결을 적어도 학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변명으로라도 설명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고교무상화법과 보조금은 일본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배울 권리를 지원하는 정책이란 점에서 환영받아야 마땅할 만한 제도이다. 그러나 정치가들의 입맛에 맞춰 재단된 적용 대상 차별은 뿌리 깊게 이어져 온 일본사회의 저급한 의식을 날것으로 보여주는 행태 그 자체이며 더구나 마이너리티에 대한 법 적용의 차별은 그 무엇보다 악하다.

올해는 해방 후 일본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많은 희생을 치르며 지켜온 민족교육사에서 큰 권리 쟁취 투쟁이었던 4.24 한신교육투쟁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학교 폐쇄령을 비롯해 반세기가 지나도록 민족교육 말살에 최선을 다해 온 일본정부의 억압을 오늘날 사법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꼴이다.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변호인단 대표, 학교 이사장, 어머니대표, 오사카 고교무상화연락회 사무국장 나가사키 유미코씨(전면 왼쪽부터)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변호인단 대표, 학교 이사장, 어머니대표, 오사카 고교무상화연락회 사무국장 나가사키 유미코씨(전면 왼쪽부터)ⓒ몽당연필 제공

재판이 끝나고 밤 9시가 넘도록 이어진 보고집회는 변호인단의 판결 설명에 이어 재판부에 대한 성토의 장이 되었다. 조선학교와 관련된 재판이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집회다. 재판 결과를 생각하면 무거운 집회가 연상되지만, 동포들의 보고집회는 오히려 밝고 힘이 넘친다. 전방위적 억압과 차별에 단련된 강인함이 낯설기까지 하다.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는 4월 27일에는 아이치 지방법원에서 다시 무상화재판이 있다. 2013년 1월에 졸업생과 재학생 10명이 원고가 되어 제소한 재판의 1심판결까지 오는데 5년이 걸린 셈이다.

최근 붉어진 아베정권의 큰 치명타가 된 모리토모학원은 같은 오사카시 소재의 사립학교법인이다. 오사카부와 오사카시가 조선학교에 보조금 지급을 정지한 시기는 모리토모학원이 인가를 얻은 시점이다. 아베 신조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를 지을 학교 부지를 헐값에 수의계약 한 스캔들로 파문이 일어났고, 그로인해 아베는 정권유지에 심각한 타격은 물론이며 국회의 질책과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지고 있다.

천황의 충량한 시민이 되길 교육하는 사립학교, 과거 식민지 교육을 연상시키는 교육을 하는 학교는 옹호하고 막대한 지원을 한 일본정부가 민족교육의 험난한 역사를 견뎌온 조선학교를 판단할 자격이 있는지 일본사회와 정치가들에게 되묻고 싶다. 더불어 남쪽에 90% 이상 뿌리를 둔 재일동포 자녀들이 처한 교육현실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한 핏줄인 재일동포 자녀들의 힘겨운 싸움에 응원의 목소리라도 보태야 되지 않겠나.

남과 북에 화해와 평화의 봄바람이 불고 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평창올림픽을 통해 한민족 한 핏줄임을 뜨겁게 확인했던 지난겨울이 불과 얼마 전이다. 바다건너 일본에도 같은 핏줄의 동포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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