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수] 열차가 입 맞춘 곳에서 '제국' 미국은 시작됐다

by 신발끈 posted Mar 1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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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입 맞춘 곳에서 '제국' 미국은 시작됐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철도와 미국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객원연구위원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출발한 UP(Union Pacific Railroad, 유니온퍼시픽레일로드), CP(Central Pacific Railroad, 센트럴퍼시픽레일로드)는 온갖 역경을 헤치고 철도를 놓으며 점점 가까워졌다. 두 회사 간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경쟁은 치열해졌다. 유타주 어딘가에서 철도가 만나는 지점이 결정될 것으로 보이자, 두 철도회사는 총력 경쟁 체제로 돌입했다. 경영진들은 정부 고위 인사를 만나 철도 연결 지점이 조금이라도 더 상대방 지역 쪽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로비를 펼쳤다. 노동자들에게 끔찍할 정도로 인색했던 경영진들조차 한 치라도 더 상대편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하루 일당을 대폭 높였다.

 

UP의 실질적 대표인 듀란트 부사장의 목표는 무조건 CP를 이기는 것이었다. 듀란트는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내세웠던 표어를 내걸었다. "먼저 이기고 지불은 나중에!". 당장 들어갈 돈을 떠나 자존심을 걸고 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각 회사의 최선봉에 선 측량기사들이 상대방 회사의 건설 지역을 지나 측량을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노사 할 것 없이 공사에 전력을 다했다. 아직 본선과 연결되지 않은 공구에서 부설 공사도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CP와 UP가 서로 지켜보며 나란히 선로 공사를 하는 지역도 생겼고 CP의 중국인 노동자들과 UP의 아일랜드 노동자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도 생겼다.

 

처음에는 UP의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흙덩어리를 던지며 CP의 중국인 노동자들을 놀렸다. 나중에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는 인부들 한가운데로 곡괭이 자루를 날리며 심기를 건드렸다. 중국인들이 일하는 현장 근처에서 사전 경고도 없이 폭약을 터뜨려 중국인 노동자 일부가 중상을 입는 일이 발생하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그러자 중국인들이 폭약을 터뜨려 아일랜드 노동자들 상당수가 생매장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동안 지속된 도발에 몇 배의 이자를 쳐서 한꺼번에 갚아준 것이다. 끔찍한 사고 이후 서로 보복행위는 잦아들었지만 두 회사의 노동자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CP와 UP가 최종적으로 만나는 지점은,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가 대통령이 된 첫해에 내려진 결정에 따라 유타주 소금호수 옆 프로몬트리 언덕 정상으로 정해졌다. 두 회사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프로몬트리 언덕을 향해 선로를 깔았다. 목표지점까지 CP가 14마일, UP가 9마일을 남겨 놓고 있던 시점에, CP의 경영진 찰스 크로커는 하루에 10마일, 16km의 선로를 놓겠다며 UP의 듀란트에게 1만 달러 내기를 제안했다. 당시 하루 평균 부설 길이는 4마일 정도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도 6마일, 약 9.6km가 최고인 상태였다. 크로커의 제안은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듀란트는 1만 달러는 자기 돈이라며 내기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CP의 공사장에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처럼 비장한 각오로 노동자들이 출발선에 대기했다. UP의 기관장 닷지와 부사장 듀란트 등 UP의 경영진들도 이 흥미로운 대결을 보기 위해 현장에 자리를 잡았다. 3000명이 넘는 중국인, 유럽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 멕시코계, 아메리카 원주민도 두세 명이 끼어 있었는데 모두 출발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7시 15분, 해가 뜨는 것으로 일이 시작됐다. 현장을 취재한 <샌프란시스코 불리틴즈> 통신원에 의하면 8분 만에 폭풍소리를 내며, 철도 부설 자재를 실은 첫 번째 그룹에 속한 16대의 마차를 비웠다고 한다.

 

이미 최고의 숙련공이 되어 있던 CP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침목을 가득 실은 마차들은 노동자보다 한 발 앞서 달리면서 땅 위에 자재를 내려놨고, 이것들을 중국인 노동자들이 노반 위에 정렬시켰다. 침목을 내려놓은 마차 뒤에는 레일을 운반하는 마차가 긴 철제 레일을 내려놓는데, 레일 하나의 길이는 약 9미터, 무게는 254킬로그램 정도였다. 이 레일들을 네 명의 노동자가 연장을 이용해 들어 올린 뒤 "아래로"라는 소리가 나면 침목 위에 내려놓는다. 궤도 간격을 맞추는 게이지와 수평을 재는 막대를 든 노동자가 레일의 위치를 정하면 해머를 든 노동자들은 대못을 박는다. 선로 고정에 필요한 대못과 볼트 등은 이미 선발대가 길을 따라 뿌려놓았다. 침목에 고정된 레일을 곧게 펴고 자갈을 뿌리고 이것을 다시 다져주는 작업이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선로 옆에는 전신주 작업팀이 선로와 보조를 맞춰 나무기둥을 세우고 전선을 이었다.

 

▲1869년 5월 10일 서부와 동부에서 시작된 센트럴퍼시픽철도와 유니언퍼시픽 철도가  만나면서 미국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었다. ⓒ구글

▲1869년 5월 10일 서부와 동부에서 시작된 센트럴퍼시픽철도와 유니언퍼시픽 철도가 만나면서 미국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었다. ⓒ구글

 

2마일(3.2km)에 걸쳐 늘어선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집단 체조나 매스게임을 하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벌여나갔다. 노동자들이 선로를 놓으면서 앞으로 나갔고, 자재와 연장을 실은 마차는 그보다 앞서서 나아갔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의 목을 축이기 위해 양쪽 어깨에 물과 중국차가 담긴 양동이를 짊어진 노동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오전 1시 30분, 점심시간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들렸을 때 이미 6마일의 선로가 놓였고 흥이 난 노동자들은 내기의 승리를 확신했다. 오후 작업은 또 다른 팀이 맡아서 하기로 했는데 자부심에 넘친 오전의 노동자들이 내친김에 오후 작업까지 해치우겠다고 나섰다.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철의 진군'을 시작했다. 저녁 7시 작업이 종료되었고 새벽에 시작한 지점으로부터 10마일 56피트, 약 16.1km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했다. 이날을 10마일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조직된 노동자들이 의지로 하나가 될 때 놀라운 성과를 낸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동쪽서 온 기차와 서쪽에서 온 기차가 입을 맞췄다

 

1869년 5월 10일 드디어 미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유타주 포트몬트리 언덕 위에는 동서 양쪽에서 전진해온 선로가 연결되었다. CP와 UP의 노동자들, 스탠포드를 포함한 "빅4'로 일컬어지는 CP의 경영진, 완공식 참석을 위해 달려오다가 체불임금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납치·감금되었다가 임금 지급 각서를 써주고 풀려난 UP의 부사장 듀란트와 기관장 닷지를 비롯한 정계, 재계와 언론사 기자들이 역사적인 개통을 보기 위해 모였다. 오후 1시로 예정된 완공식 행사를 두고, 시작 전부터 CP와 UP의 경영진들이 대립을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설전이 오갔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이자 두 철도의 연결을 상징하는 마지막 퍼포먼스인 골든 스파이크를 누가 박을 것인지를 놓고 두 회사가 양보 없는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스탠포드는 "CP가 UP보다 먼저 주식회사가 되었으니 내가 마지막을 장식해야 한다"고 했고 닷지는 "UP의 철도가 더 길기 때문에 듀란트가 골든 스파이크를 박아야 한다"고 맞섰다. 긴 싸움 끝에 골든 스파이크 박기는 스탠포드의 몫이 된다.

 

두 철도의 연결을 완결 짓는 예식이 시작되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레일 한 가닥을 들었다. 아일랜드 노동자들도 한 가닥을 들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온 두 철로의 마지막 구간에 놓았다. 두 선로가 맞닿은 지점의 침목 위로 듀란트가 골든 스파이크를 살짝 박았다. 이어서 스탠포드가 해머를 내리치면, 골든 스파이크가 완전히 박히면서 대륙횡단철도 완공 소식이 미국 전역에 타전될 상황이었다. 스탠포드는 힘껏 해머를 들어 골든 스파이크의 머리를 향해 가격했다. 꽝 소리와 함께 대륙횡단 철도 완공소식이 전신을 탔다. 그러나 스탠포드의 해머는 골든 스파이크가 아닌 레일을 맞혔다. 재차, 삼차 시도 끝에 골든 스파이크가 박히자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샴폐인을 터뜨렸다. 선로 양쪽에 대기하고 있던 기관차 두 대가 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온 CP의 쥬피터호와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려온 UP의 NO.119호 증기기관차가 점점 가까이 붙더니 가볍게 입을 맞췄고 사람들은 더 큰 함성으로 둘의 만남을 환영했다. 입을 맞췄던 주피터 호와 119호는 다시 후진, 각각 객차를 연결했다. 먼저 119호가 객차를 연결한 채로 앞서 키스를 나누었던 지점을 넘어갔다 돌아왔다. 상대방의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쥬피터 호도 객차를 물고 UP가 놓은 선로 위로 들어갔다가 후진해 돌아왔다. 1862년 태평양 철도법이 마련되며 본격화된 대륙횡단철도가, 숱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 미국을 하나로 묶었다. 남북전쟁으로 분열의 상처를 앓고 있던 미 연방은 철도를 통해 서서히 회복의 길로 나아갔다.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된 이후 이 노선과 연결되는 지선들이 앞다투어 건설됐다. 미국은 세계최고의 철도 나라가 되었다. 주정부와 연방정부는 적극적으로 철도 건설을 보조했다. 철도회사들은 사기업이었지만 철도 산업은 사실상 공공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철도로 여겨지는 노선들은 겉모양이 비록 민간회사의 옷을 입었을지라도 국가의 지원을 기초로 하고 있다. 횡단철도는 미국 발전의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목숨을 걸고 수개월을 걸쳐 지나야 했던 길인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일주일이면 주파할 수 있게 되자, 미 대륙은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는 신세계로 나아갔다.

 

대륙횡단철도는 미국 산업의 지형도 바꿔 놓았다. 태평양철도법에 따라 횡단철도에 쓰이는 철강은 미국산만 쓸 수 있게 됐는데, 이에 힘입어 철강 산업이 대약진을 하게 된다. 피츠버그에서 작은 제철소를 운영하던 앤드류 카네기는 탄광을 매입하고 철광석 운반선단을 운영하면서 몸집을 불리더니 철도 회사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철도 덕에 가난한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 인사가 미국의 강철왕으로 거듭났다. 철강회사들만 혜택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금융 자본도 기지개를 켰다. J.P 모건은 카네기로부터 철강회사를 사들이고 다른 철강 기업들을 합병, US철강회사를 설립했는데 당시 미국 강철 생산량의 3분의 2를 장악했다. 모건은 산업자본가가 아니라 은행가였다. 주식회사가 등장한 후 주식의 매입과 인수, 합병 등에 참여하면서 금융이 산업 자본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은행이 감당하고 있는 자금과 신용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되는데, 사실상 불로소득인 수수료나 고율의 이자, 채권을 이용한 수입 확대 등이 그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말했던 생산 과정 외부에 존재하며, 훨씬 보편적이고 구속되지 않는 범주의 수익을 챙기면서 성장하는 거대 기업들이 나타났다.

 

철도망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를 활용한 기업들이 승승장구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꽃을 피운 '검은 황금', 석유를 장악한 스탠더드오일(Standare Oil)의 확장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스탠더드오일 사장 록펠러는 닥치는 대로 정유회사를 사들였다.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뉴욕, 볼티모어, 클리블랜드 등 동부 도망으로 연결된 지역들의 정유공장 대부분을 사들였다. 정유회사들을 장악한 록펠러는 수평적 확대를 넘어 수직적 통합에 나섰다. 정유회사를 정점으로 화물차량, 창고, 송유관 사업뿐만 아니라 석유통 제조 사업까지 뛰어들었다. 판매망까지 수직 계열화를 이룬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석유 산업계의 막강한 지배력을 가진 독점자본이 되었다.

 

대륙횡단철도가 만든 스탠포드 대학교

 

흔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는 주요 동인은 경쟁이라고 한다. 치열한 경쟁이 생산성을 높여주고, 그 힘으로 시장경제가 나날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자본가나 기업들은 독점의 단 열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석유 재벌 록펠러조차 살인적인 경쟁이야말로 현대 경제에 있어 최악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시장에서 독점적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 형태들은 카르텔, 트러스트, 지주회사 형태로 진화하는데 최초의 카르텔은 미국철도연합이었다.

 

철도회사들은 시장을 나누어 지배하고 불필요한 경쟁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운임을 통일했다. 하지만 철도회사 간 내부 담합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주 깨졌다. 새로운 기업지배방식이 필요했다. 은행가 모건이 나서 트러스트 모델을 세웠는데 개별 주식회사의 주주는 트러스트에서 배당을 받는 조건으로 소규모 수탁 집단에 주식을 신탁했다. 주식을 수탁 받은 소수의 금융자본이 다수의 기업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자본가들이 소수의 지분으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트러스트는 지주회사를 통해 완성되었다. 록펠러가 스탠더드오일을 통해 최초로 선보였는데, 뉴저지주가 주법 개정을 통해 기업 매매를 가능하게 하자 바로 자신의 회사를 뉴저지주로 옮기고 지주회사를 설립했다. 록펠러가 세운 지주회사는 트러스트들의 주식들을 매입해 소유권을 갖고, 산하 기업들을 중앙집중형으로 관리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것은 양극화다. 이미 19세기 말에 미국 내 기업 1%가 제조업의 33%를 통제하게 되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미국의 위대한 초기 개척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만 자본과 국가, 정치권력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도 잘 보여준다. 모두 한통속이 되어 부정부패와 이권쟁탈의 거대한 용광로가 됐던 횡단철도는 새로운 제국, 미국을 일으켜 세웠다. 연방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불하받은 토지를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기며 팔아 막대한 돈을 번 CP의 사장 릴런드 스탠퍼드는 외아들이 장티프스에 걸려 죽는 비극을 겪는다. 1891년 스탠퍼드는 자신이 소유한 캘리포니아의 거대한 부동산 부지에 대학을 설립한다. 대학 이름은 자신의 아들 이름을 딴 릴랜드 스탠퍼드 주니어 대학(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으로, 스탠퍼드 대학이라고 알려진 서부 최고의 명문 대학이다. 스탠퍼드가 CP의 출발지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을, 죽은 아들 대신 모두 아들로 삼겠다며 만든 대학이다. 대륙횡단철도가 만든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은 구글, 야후, 휴렛 팩커드, 나이키 등 미국의 굵직한 회사를 창업해 스탠퍼드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앤드류 카네기는 철도와 강철에 매료되었다. 카네기가 첫 번째로 세운 US Steel 철강회사(피터스버그) 모습. ⓒ구글

▲앤드류 카네기는 철도와 강철에 매료되었다. 카네기가 첫 번째로 세운 US Steel 철강회사(피터스버그) 모습. ⓒ구글

 

조선인 유길준, 미국 대륙횡단열차 탄 소감은?

 

한국 사람 중에서 미국 대륙횡단 철도를 처음 탔던 이는 유길준이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미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공사 푸트(Foot, L.H.)가 조선을 방문했는데, 조정은 이에 대한 답례로 1883년 9월 전권대신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報聘事)라는 이름의 미국사절단을 보낸다. 유길준은 이미 1881년 시찰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였다. 일본을 방문했던 유길준은 다른 일행이 조선으로 귀국할 때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남았다.

 

26세의 젊은 청년 유길준의 눈에 비친 일본은 충격 그 자체였다. 관료들의 부패가 판을 치고 양반 귀족들이 백성들의 피를 뽑아먹고 있는 조선이 항로를 잃은 채 난파된 배였다면, 일본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등 메이지유신을 통해 막 기지개를 켜는 거인이었다. 한양의 사대문 안조차도 비만 오면 진창이 되어 제대로 걸을 수 없던 시절에, 도쿄의 시나가와에서 요코하마로 가는 기차를 본 유길준은 두 나라의 차이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유길준은 일본이 급부상한 것이 지난 30여 년간 서양의 발달된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길준은 일본에서 근대화의 기틀을 닦은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고 그의 문하생으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다.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답사하고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부국강병을 내세우며 일본의 개화와 서구화를 이끌었다. 오늘날 1만 엔짜리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이 되어 일본에 머물던 유길준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임오군란 때문이었다. 정치적 격변으로 혼란에 빠진 후원자 민영익의 요청으로 급히 현해탄을 건너왔다. 고종의 왕비인 민 씨의 후광으로 승승장구한 민영익은 유길준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다. 민영익은 일본 시찰단으로 가게 되면서 수행원으로 유길준을 선정했는데, 사정이 생겨 갈 수 없게 되자 고종을 설득해 다른 시찰단원인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끼워 넣었다. 민영익은 조선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새로운 문물을 봐야 한다고 고종을 설득했다.

 

유길준이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갈 때는 자신의 절친이자 후원자인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배를 탔다. 미국으로 보내는 최초의 외교사절 보빙사의 대표는 24세의 전권대신 민영익이었다. 부사로 홍영식, 서기관 서광범, 수행원으로 유길준이 긴 여정을 나서는데 이 보빙사가 유길준의 일행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유길준은 미국을 비롯해 자신이 방문한 나라들을 보고 느낀 것을 기록했다. <서유견문>은 그 결과물이었다. 유교적 가치관이 몸에 익은 삶, 왕에 대한 충성심, 외세 앞에 흔들리는 조정,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과 합리론, 눈부신 과학기술,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조선 백성 등 격변의 시대 유길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1883년 7월 제물포항을 떠난 유길준은 나가사키와 도쿄를 거쳐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미국 대통령이 있는 워싱턴에 가기 위해서는 대륙횡단철도를 타야만 했다. 28세의 젊은 외교사절은 광활한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길준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는 CP의 열차를 탔다. 열차에 탄 사람들은 갓에 도포를 쓴 이상한 복색의 아시아계 승객들을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고 한다. 유길준은 외교사절단의 예우에 맞게 고급 객실에 탄 것이 분명하다. <서유견문>에 기록된 유길준의 글은 정확히 호화로운 객차의 대명사인 풀먼 객차를 묘사하고 있다.

 

▲1883년 미국 외교사절단인 보빙사 단원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길준이다.

▲1883년 미국 외교사절단인 보빙사 단원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길준이다.

 

"기차는 증기기관의 힘을 빌려서 움직이는 차인데, 화륜차라고도 한다. 앞차 한 량에다 증기 기계를 장치하여 기관차라 이름하고, 기관차 한 량으로 다른 차 20, 30량 내지 40, 50량을 끈다. 기차가 달리기 위하여 길을 닦은 뒤에, 두 줄의 철선을 깔아 그 이름을 철로라고 한다. 철로를 가설하는 재료는 철선과 침목이다. 철선의 너비는 2촌이고 두께도 4촌에 지나지 않지만…(중략)철로를 까는 비용은 지형이 험한지 평평한지에 따라 같지 않지만, 대략 평균 수치로 우리나라 1리 되는 거리에 3000원이 든다.

 

멀리 가는 차는 밤낮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차 안에다 침구를 갖춰 놓았는데, 낮에는 걷어서 차벽에 걸어두고, 밤에는 내려서 평상처럼 된 상하 2층의 침대를 만든다. 또 음식차가 있어서 하루 세 끼를 제공하고, 세면실과 변소의 위치도 조리 있게 배치되어서 아주 편리하다. 철로와 차바퀴가 서로 맞물린 제도가 일정한 규모로 뻗어나가, 1만 리 밖까지 이르러도 조그만 오차가 없다." (<서유견문> 중)

 

유길준 일행이 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향하는 대륙횡단열차 안에는 이 일행에 호기심을 보이고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유길준 일행과 3일간 여정을 함께했던 미국 감리교 목사 가우처(John F. Goucher)였다. 해외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가우처는 조선이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이 미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가우처는 일본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맥클레이(Robert McLay)에게 조선 선교 가능성을 타진했고, 맥클레이는 주미공사 푸트의 도움을 받아 1884년 6월 조선에 들어와 2주간 둘러본다.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조선이었다.

 

맥클레이는 직접적인 선교보다 의료나 교육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기독교를 자리잡게 한다. 맥클레이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다음해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가 들어와 기독교의 뿌리를 내린다.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와 새문안 교회로 알려진 정동교회를 세웠는데 한국 역사상 첫 개신교 교회였다. 미국 대륙횡단열차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대한민국이 세계 최대의 신도 수를 갖는 대형 교회를 보유하는 성과를 이루는 씨앗이 되었다. 미국의 정신과 결합한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은 한국 교회를 친미 반공의 보루가 되게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친미 반공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늘 부와 권력이라는 태양궤도 가까이에 붙어 도는 행성이 되었다.

 

몰락 왕국의 젊은이 유길준의 삶

 

19세기 말 몰락해가는 왕국의 젊은이가 본 미국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유길준은 시찰단으로 갔다가 일본에 남은 것처럼, 보빙사가 미국 일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 미국에 홀로 남았다. 네 살 아래의 친구이자 전권대신 민영익의 부탁도 있었을 것이었지만 미국에 남아 더 배워야겠다는 유길준의 욕심도 있었다. 유길준은 메사추세츠주 셀럼시 피바디 박물관 관장이었던 모스(Edward Sylvester Morse) 박사의 지도를 받게 된다. 외교사절단에서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조선의 관리이면서 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여러모로 고독한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 한국인의 멕시코 이주 역사를 배경으로 삼은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에는 조선 정부가 보내준 돈이 부족해 고민하는 유길준의 모습이 나온다. 지금이야 미국이나 유럽의 사정에 훤하지만 19세기 말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이다. 조선정부가 이역만리 단신으로 남겨진 하급 관리에게 충분한 배려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조정은 자신들의 앞가림을 하기에도 벅찼다. 유길준의 미국 유학시절 사진을 보자. 서양식 헤어스타일에 약간은 비뚤어진 나비넥타이를 멨다. 눈은 깊은 우수에 잠겨 있다. 굶주린 형제들을 집에 둔 채 혼자서만 부자의 잔치 집에 초대된 듯한 표정이다.

 

▲미국 유학생 시절의 유길준

▲미국 유학생 시절의 유길준

구글 검색을 해보면 유길준의 학력은 보스턴 대학 1년 중퇴로 나온다. 유길준은 왜 미국 유학을 접어야 했을까? 일본 유학 생활을 임오군란으로 중단해야 했던 것처럼, 미국 생활은 갑신정변 때문에 이어갈 수 없었다. 1884년 겨울, 미국의 친구들이 유길준에게 신문을 보여주고 "네 나라에서 난리가 났다"며 정변이 일어났음을 알려주었다. 정변은 미국의 국비 유학생이 더 이상 학업을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 혼란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의 젊은이는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바로 귀국길에 오르지 않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증기선에 올랐다. 기내식을 먹으며 열네 시간 남짓 비행을 하면 귀국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정변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다 해도 한 달 이상 걸리는 여정을 감안하면 이미 정변의 긴장이 사라진 조국에 발을 내딛게 된다.

 

내친김에 서양세계를 둘러보게 되었고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수에즈운하를 지나 싱가포르, 홍콩을 거치는 대장정을 수행한다. 1885년 귀국하자마자 개화파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된 유길준은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이 지나서 풀려난다. 이후에는 우포도청장 한규설의 집에 연금되었다. 유길준을 한규설의 집에 연금한 이유는 수구파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연금생활 2년이 지나 백록동 취운정으로 유폐된 유길준은 본격적으로 <서유견문>을 집필하기 시작해 1889년 원고를 완성하고 1890년 한규설을 통해 고종에게 바쳤다.

 

유길준이 부국강병을 외치며 국민경제회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고 국내산업자본의 육성을 위해 노력한 이유는, 자신이 보고 온 서양을 쫓아가려면 오직 국력 양성밖에 없다고 본 결과였다. 특히 1905년 호남철도회사를 통해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려 했던 것은 미국 대륙횡단열차를 비롯한 철도가 만들어낸 신세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해외 유학파는 자신이 공부한 나라에 친화적인 인물이 된다. 일본 유학파는 일본에 우호적이고 미국 유학파들은 미국에 경도된다. 그러나 일본 유학파의 일원으로 일본 근대사상의 대부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사사했음에도 적극적인 친일파가 되지는 않았다. 1892년에는 미국인 페인이 단돈 14만 원에 조정으로부터 전기 가설권을 사들이려고 했다. 영문을 해독할 자가 없어 유기륜이라는 자가 책임을 맡았는데 유길준이 나서서 나라의 보물과도 같은 것을 단돈 14만 원에 넘길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권 침탈을 막았다. 또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을 반대했고 고종의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이완용이 주도한 정미7조약도 반대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하고 조선귀족령에 의해 유길준에게 남작 작위를 부여했으나 거부하고 반환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유길준이 민족의 장래를 밝힌 선각자는 아니었다. 을사조약엔 반대했지만, 개혁에 실패하고 당쟁만 일삼은 조선이 당연히 받는 징벌이라 여겼다. 하루가 다르게 천지가 개벽하는 세상을 두 눈으로 보고 온 유길준은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선 조선의 현실이 암담할수록 시니컬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유길준은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세계관을 가졌고 이런 시각은 국가주의나 군국주의로 흐르거나 쉽게 자포자기하거나, 양극단을 오가게 된다. 민영익의 후견을 받는 등 민 씨 가문의 혜택을 받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대원군 편에 섰다. 황후 민씨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교하며 암살에까지 관여한다. 안중근이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전국적인 추도회를 열었던 사람이자,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국채보상금 처리회장의 역할도 맡았던 유길준의 행적은 혼란의 시대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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