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강바람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인간의 탐욕으로 뜨거워진 이 땅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이.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등 4대 종단 인사를 비롯한 16명이 12일 경부대운하 반대를 위한 100일 국토순례에 나섰다.
이날부터 4월1일까지 운하가 계획된 강줄기를 따라 100일 동안 천막을 치고 노숙을 하는 이들의 고행은, 오후 1시 강바람 몰아치는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애기봉에서 200여명의 환송 속에서 시작됐다. 출정식에서 이들은 “생명을 경시하는 개발지상주의에 대한 성찰과 우리 시대의 생명평화를 위한 도보순례를 시작한다”고 밝히고, 종교별로 생명 경시에 대한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천주교 김규봉 신부(창조보전 전국모임 사무처장)는 “하느님 당신의 창조물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데도 그보다는 경제와 돈이라는 우상을 섬겨왔다”고 고백했고, 개신교를 대표해 기도한 성공회 최상석 신부는 “하느님의 유산인 산과 강이 이토록 찢기게 한 데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회한다”고 말했다. 지관 스님(김포불교환경연대 대표)도 “새벽마다 부처님전에 차 공양을 올리면서도 이 강물이야말로 감로수임을 망각했다”고 고백했다.
장도를 배웅하러 온 김지하 시인은 “며칠 전 타버린 숭례문은 ‘예’를 숭상하라는 것인데, 우리가 자연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릴 때 결국은 우리 자신도 더이상 숨쉴 수 없게 된다”며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개발과 소비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돼 10년, 아니 7년 안에 치명적 바이러스가 몰려와 인류가 큰 위기에 처한다는 게 미래학자들의 예언”이라고 각성을 촉구했다. 순례단장인 이필완 목사가 “한반도 대운하가 한반도 대운구 행렬이 되지 않을지 두렵기만 하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출발을 선언함으로써 침묵의 순례는 시작됐다. 순례길의 종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나 불자라기보다는 ‘생명’에 귀의한 하나의 종교인들이었다.
이번 순례엔 국내 생명운동의 정신적 지주들이 총출동했다. 전북 부안에서 서울까지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삼보일배를 했던 수경 스님(불교환경연대 대표)이 다시 나섰고, 당시 수경 스님과 함께했던 문규현 신부도 매주 하루씩 참여하기로 했다. 지리산 실상사에서 힘을 모아 국내 생명운동을 혁신시킨 수경-도법-연관 스님 3인방은 이번에 다시 100일을 함께하게 됐다. 5년째 전국을 걷고 있는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대표)은 생명평화탁발순례 여정을 이곳으로 돌렸다. 양재성 목사(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와 김민해 목사, 김경일 성공회 신부, 최종수 신부 등도 일찌기 지리산 일대에서 생명운동을 함께했던 이들이다. 차흥도 목사(감리교 농촌선교훈련원 원장), 이동훈 신부, 홍현두 교무(원불교 천지보은회 홍보실장) 등도 각 종교의 대표적인 생명운동가들이다.
시민단체, 지식인 사회에 영향력이 큰 종교계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경부대운하 반대 운동에 나섬에 따라 경부대운하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인들은 특히 이번 순례에서, 목소리에 힘을 실었던 종전의 ‘운동’ 방식을 벗어나 침묵의 걷기를 택했다. 수경 스님은 “이 땅의 산과 강은 생명의 요람이자 교회요, 성당이자 법당”이라며 “인간만의 욕망 때문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온갖 생명체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참회의 기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